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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수사의 경계선 -“도청된 대화와 디스켓 속 문건, 증거가 될 수 있는가”

과학수사저널 2025. 7. 10. 13:43

오늘날 디지털 포렌식은 수사기관의 핵심 수단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삭제된 데이터, 위조된 문서, 수정된 파일, 메신저 기록 등 우리가 전자기기를 통해 남긴 모든 흔적은 곧 ‘진실의 조각’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디지털 증거가 아무리 정밀하더라도, 수집과 분석의 절차가 정당하지 않다면 법정에서는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합니다.

이 원칙을 분명히 보여준 대한민국의 대표적 판례가 있습니다. 바로 **1999년 대법원이 선고한 ‘영남위원회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한국 디지털 포렌식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자, ‘절차의 정당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과서라 할 수 있습니다.

‘디스켓’에서 시작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1997년, 부산 지역에서 활동하던 ‘영남위원회’ 소속 피고인들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대대적인 압수수색이 이루어졌습니다.
수사기관은 이 과정에서 다수의 디스켓과 프린트된 문서, 이메일 초안 등을 확보하였습니다. 디스켓 안에는 북한 관련 문건, 주체사상에 대한 글 등이 저장되어 있었고, 수사기관은 이를 *“이적 문서”*로 간주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디지털 포렌식이라는 개념이 국내에 뿌리내리기 전이었지만, 이 사건은 자연스럽게 디지털 증거의 진정성 문제를 중심에 놓이게 했습니다.

디지털 포렌식 분석의 핵심 쟁점: “작성자는 누구인가?”

압수된 디스켓 안의 문서는 피고인의 직접적인 자백이나 진술 없이 증거로 제출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작성자의 확인(진정성립)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당시 법원은 아래와 같은 이유로 대부분의 디지털 자료에 대해 증거능력을 부정했습니다.

  • 작성자 불명확: 문서를 누가 썼는지 특정할 수 없음
  • 포렌식 분석 미흡: 파일의 생성 시점, 최종 수정일, 접근 기록 등 디지털 메타데이터 분석이 부실
  • 원본성 결여: 문서가 실제 원본인지, 복사본인지 구분되지 않음

이런 결과는 디지털 포렌식 기술이 단순히 ‘파일을 찾는 기술’에 그쳐서는 안 되고, 작성자 식별과 문서 진위 판단까지 포괄해야 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도청 녹취파일: 디지털 증거일까, 인권 침해일까?

이 사건에서 수사기관은 또 하나의 디지털 자료를 확보했습니다.
바로 피고인의 휴대전화 및 자택 전화 도청 녹취파일입니다. 이 음성 파일은 디지털 장비를 이용해 녹음되었고, 당시에 보기 드물게 디지털 음성 파일로 법정에 제출되었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이 증거를 다음과 같은 이유로 위법 수집 증거로 판단하였습니다.

  • 법원이 허가한 통신제한조치 범위 초과: 수사기관은 통화 내역만 수집 가능했으나, 실제로는 대화 내용 전체를 녹음
  • 절차적 위반: 녹취 과정이 명백한 위법 도청으로 분류됨

즉, 아무리 포렌식 장비로 정확하게 녹음한 디지털 파일이라 하더라도, 수집 과정이 불법이면 그 자체로 무효라는 것입니다. 이 판단은 이후 디지털 포렌식 절차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파일이 있다고 유죄는 아니다 – 맥락 없는 디지털 증거의 한계

수사기관은 디스켓 외에도 다양한 이메일 초안, 프린트 문건 등을 제출했지만, 대부분 법원에서 증거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법원이 제시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 작성자 확인 불가
  • 문서의 맥락 단절
  • 내용의 객관성 결여

당시 대법원 판결문에는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포렌식적 기준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컴퓨터 디스켓 등 전자기록은 내용의 진정성립이 증명되어야만 증거로 쓸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수사기관의 일방적 해석에 따른 편향 가능성이 있다.”

이 문장은 지금도 디지털 포렌식 실무에서 *‘기준 문구’*처럼 반복해서 인용됩니다.

 

법적 결론과 디지털 포렌식의 교훈

최종적으로 대법원은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습니다:

  • ‘영남위원회’는 반국가단체는 아니나, 이적단체로는 인정
  • 불법 도청 자료와 작성자 불명 디지털 문건은 모두 증거능력 부정
  • 일부 유죄 인정 후, 사건은 부산고등법원으로 환송

이 사건은 단순히 포렌식 기술의 유무보다, 그 기술이 어떻게 적용되었는가, 즉 절차의 적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

2025년 현재, 디지털 포렌식 기술은 놀라운 발전을 이뤘습니다. 삭제된 메시지 복구, 클라우드 서버 추적, 파일 조작 여부 분석까지 정밀하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남위원회 사건’이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디지털 증거는 진실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직, 정당한 절차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수사기관은 증거 수집을 위한 기술뿐만 아니라, 절차적 정당성을 지키기 위한 포렌식 전략을 반드시 병행해야 합니다.

디지털 시대의 진실은 기술이 아니라 절차 속에서 증명됩니다.

마무리하며

‘영남위원회 사건’은 디지털 포렌식 수사에서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법’이라는 본질을 되새기게 합니다.
이 사건을 단순한 과거 판례로 치부하지 마세요.
그 교훈은 오늘날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유효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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