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수사

[해외] “그를 다시 데리러 가야 했나요?”

과학수사저널 2025. 6. 4. 17:08

2022년 1월 29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칸톤(Canton).
눈 내린 고요한 새벽, 한 경찰관의 시신이 주택 앞 마당 눈밭 위에서 발견됩니다.
존 오키프(John O’Keefe), 16년 경력의 보스턴 경찰. 그의 시신 곁에는 핏자국, 차량 충돌 흔적, 그리고 혼란스러운 발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건은 단순히 얼어죽은 비극이 아니었습니다.
사건 현장에는 자동차, 스마트폰, 통신 기록디지털 흔적들이 남아 있었고,
그 흔적들을 모아 실체를 좇는 이들이 있었죠.

디지털 포렌식 전문가들입니다.

포렌식의 시작: 의심은 차량에서 출발했다

오키프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연인 카렌 리드(Karen Read)**였습니다.
그녀는 오키프를 주택 앞에 내려준 후 “그가 집에 들어간 줄 알고 떠났다”고 진술했지만,
시신 발견 위치와 상태는 그 진술을 그대로 믿기 어려운 단서를 남겼습니다.

그래서 수사팀은 먼저, 차량을 확보해 디지털 포렌식 분석에 착수했습니다.

디지털 증거 1: 차량 블랙박스 & ECU –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현대 차량의 핵심 디지털 저장장치는 블랙박스뿐 아니라,
ECU(전자제어유닛), TCU(변속 제어 장치), 에어백 모듈, EDR(Event Data Recorder) 등 다양한 장치로 구성됩니다.

리드의 SUV, 렉서스 RX350에서 확보된 데이터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 2022년 1월 29일 00:32
    ➤ 기어가 ‘R’(후진)에서 ‘D’(전진)으로 전환됨
  • 해당 시점 약 0.3초간 급정지 또는 저속 충돌 반응이 기록됨
  • 차량 후면에 미세한 충돌 자국 및 오키프의 DNA 검출

이 데이터는 차량이 짧은 순간 무언가에 접촉한 후 방향을 바꾸었음을 의미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시점은 오키프의 스마트폰이 마지막으로 활동한 시각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디지털 포렌식 분석가는 이 로그와 충돌 이벤트를 종합해,
오키프가 차량에서 내린 직후 후진 중 접촉 또는 충격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디지털 증거 2: 스마트폰 위치 로그 – 움직임이 멈춘 시간

오키프의 iPhone 위치 이력 또한 사건의 흐름을 뒷받침했습니다.

  • 00:32 이후, 오키프의 휴대전화는 6시간 넘게 한 지점에서 정지
  • 그 위치는 주택 앞 마당, 시신이 발견된 바로 그곳
  • 반면, 리드의 휴대폰은 00:33 이후 이동한 경로를 기록

스마트폰의 위치 정보는 기지국 로그, GPS 신호, 그리고 Wi-Fi 접속 이력 등으로 구성됩니다.
이 데이터들은 사람이 실제로 움직였는지, 혹은 기기만 현장에 남았는지를 판단하는 핵심 단서가 되죠.

결과적으로, 포렌식 분석은 오키프가 차량에서 내린 직후 쓰러졌으며,
이후 장시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뒷받침했습니다.

디지털 증거 3: 문자 & 음성 메시지 – 데이터 속 감정의 흔적

디지털 포렌식은 기계적 기록만 분석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감정과 행동 패턴도 분석 대상이 됩니다.

리드가 보낸 문자 메시지 및 음성 기록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였습니다:

  • “왜 안 들어가는 거야? 나 너무 불안해.”
  •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 (음성 메시지) “존, 너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이는 AI 기반 텍스트 감정 분석 시스템에서 감정 격앙, 불안, 분노, 혼란 등의 정서를 동반한 의사소통으로 분류되었습니다.

검찰은 이 메시지를 통해 리드가 오키프와 갈등이 있었으며,
사고 후 자책보다는 분노 중심의 반응을 보였다고 판단했습니다.

법정의 해석: 사실을 조합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디지털 포렌식은 **“기록된 사실”**을 보여주지만,
그 사실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인간의 영역입니다.

검찰 측 주장:

  • 리드가 연인과의 다툼 끝에 후진 중 고의로 들이받고 현장을 떠났다
  • 차량 충격 기록, DNA, 위치 정보, 문자 내용 모두가 의도적인 행동을 시사
  • 메시지는 사후 조작 혹은 후회 연기일 가능성이 있다

변호인 측 주장:

  • 오키프는 차에서 내린 후 주택 내에서 폭행당했으며,
    시신은 이후 외부로 의도적으로 옮겨졌다
  • 해당 주택의 거주자가 보스턴 경찰 소속이라는 점에서
    경찰 내부 은폐 및 조작 가능성 제기
  • 블랙박스, DNA 분석은 맥락 없이 해석되었으며, 증거 수집 절차도 미흡

 디지털 포렌식의 교훈: 기술은 증언한다. 그러나 해석은 인간의 몫이다

이번 사건은 디지털 포렌식이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진실에 접근하는 과학적 방법론임을 보여줍니다.

  • 차량의 ECU와 EDR 로그는 충돌의 물리적 시점을 기록했고
  • 스마트폰 위치 정보는 피해자의 마지막 움직임을 복원했으며
  • 문자 및 음성 기록은 사건 당시 감정 상태와 관계 동태를 비췄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데이터는,
정확하지만 ‘중립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해석을 통해
살인 사건이 되거나, 억울한 사고가 되기도 합니다.

결론: 디지털 흔적은 진실의 조각일 뿐

카렌 리드 사건은 단순히 하나의 범죄 수사가 아닙니다.
이 사건은 디지털 포렌식의 중요성과 한계,
그리고 기술의 객관성과 인간의 주관성이 어떻게 충돌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오늘날, 디지털 포렌식은 살인, 실종, 교통사고, 사이버 범죄 등
수많은 사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하나입니다.

기술은 진실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인간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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