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29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칸톤(Canton).
눈 내린 고요한 새벽, 한 경찰관의 시신이 주택 앞 마당 눈밭 위에서 발견됩니다.
존 오키프(John O’Keefe), 16년 경력의 보스턴 경찰. 그의 시신 곁에는 핏자국, 차량 충돌 흔적, 그리고 혼란스러운 발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건은 단순히 얼어죽은 비극이 아니었습니다.
사건 현장에는 자동차, 스마트폰, 통신 기록 등 디지털 흔적들이 남아 있었고,
그 흔적들을 모아 실체를 좇는 이들이 있었죠.
디지털 포렌식 전문가들입니다.
포렌식의 시작: 의심은 차량에서 출발했다
오키프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연인 카렌 리드(Karen Read)**였습니다.
그녀는 오키프를 주택 앞에 내려준 후 “그가 집에 들어간 줄 알고 떠났다”고 진술했지만,
시신 발견 위치와 상태는 그 진술을 그대로 믿기 어려운 단서를 남겼습니다.
그래서 수사팀은 먼저, 차량을 확보해 디지털 포렌식 분석에 착수했습니다.
디지털 증거 1: 차량 블랙박스 & ECU –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현대 차량의 핵심 디지털 저장장치는 블랙박스뿐 아니라,
ECU(전자제어유닛), TCU(변속 제어 장치), 에어백 모듈, EDR(Event Data Recorder) 등 다양한 장치로 구성됩니다.
리드의 SUV, 렉서스 RX350에서 확보된 데이터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 2022년 1월 29일 00:32
➤ 기어가 ‘R’(후진)에서 ‘D’(전진)으로 전환됨 - 해당 시점 약 0.3초간 급정지 또는 저속 충돌 반응이 기록됨
- 차량 후면에 미세한 충돌 자국 및 오키프의 DNA 검출
이 데이터는 차량이 짧은 순간 무언가에 접촉한 후 방향을 바꾸었음을 의미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시점은 오키프의 스마트폰이 마지막으로 활동한 시각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디지털 포렌식 분석가는 이 로그와 충돌 이벤트를 종합해,
오키프가 차량에서 내린 직후 후진 중 접촉 또는 충격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디지털 증거 2: 스마트폰 위치 로그 – 움직임이 멈춘 시간
오키프의 iPhone 위치 이력 또한 사건의 흐름을 뒷받침했습니다.
- 00:32 이후, 오키프의 휴대전화는 6시간 넘게 한 지점에서 정지
- 그 위치는 주택 앞 마당, 시신이 발견된 바로 그곳
- 반면, 리드의 휴대폰은 00:33 이후 이동한 경로를 기록
스마트폰의 위치 정보는 기지국 로그, GPS 신호, 그리고 Wi-Fi 접속 이력 등으로 구성됩니다.
이 데이터들은 사람이 실제로 움직였는지, 혹은 기기만 현장에 남았는지를 판단하는 핵심 단서가 되죠.
결과적으로, 포렌식 분석은 오키프가 차량에서 내린 직후 쓰러졌으며,
이후 장시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뒷받침했습니다.
디지털 증거 3: 문자 & 음성 메시지 – 데이터 속 감정의 흔적
디지털 포렌식은 기계적 기록만 분석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감정과 행동 패턴도 분석 대상이 됩니다.
리드가 보낸 문자 메시지 및 음성 기록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였습니다:
- “왜 안 들어가는 거야? 나 너무 불안해.”
-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 (음성 메시지) “존, 너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이는 AI 기반 텍스트 감정 분석 시스템에서 감정 격앙, 불안, 분노, 혼란 등의 정서를 동반한 의사소통으로 분류되었습니다.
검찰은 이 메시지를 통해 리드가 오키프와 갈등이 있었으며,
사고 후 자책보다는 분노 중심의 반응을 보였다고 판단했습니다.
법정의 해석: 사실을 조합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디지털 포렌식은 **“기록된 사실”**을 보여주지만,
그 사실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인간의 영역입니다.
검찰 측 주장:
- 리드가 연인과의 다툼 끝에 후진 중 고의로 들이받고 현장을 떠났다
- 차량 충격 기록, DNA, 위치 정보, 문자 내용 모두가 의도적인 행동을 시사
- 메시지는 사후 조작 혹은 후회 연기일 가능성이 있다
변호인 측 주장:
- 오키프는 차에서 내린 후 주택 내에서 폭행당했으며,
시신은 이후 외부로 의도적으로 옮겨졌다 - 해당 주택의 거주자가 보스턴 경찰 소속이라는 점에서
경찰 내부 은폐 및 조작 가능성 제기 - 블랙박스, DNA 분석은 맥락 없이 해석되었으며, 증거 수집 절차도 미흡
디지털 포렌식의 교훈: 기술은 증언한다. 그러나 해석은 인간의 몫이다
이번 사건은 디지털 포렌식이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진실에 접근하는 과학적 방법론임을 보여줍니다.
- 차량의 ECU와 EDR 로그는 충돌의 물리적 시점을 기록했고
- 스마트폰 위치 정보는 피해자의 마지막 움직임을 복원했으며
- 문자 및 음성 기록은 사건 당시 감정 상태와 관계 동태를 비췄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데이터는,
정확하지만 ‘중립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해석을 통해
살인 사건이 되거나, 억울한 사고가 되기도 합니다.
결론: 디지털 흔적은 진실의 조각일 뿐
카렌 리드 사건은 단순히 하나의 범죄 수사가 아닙니다.
이 사건은 디지털 포렌식의 중요성과 한계,
그리고 기술의 객관성과 인간의 주관성이 어떻게 충돌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오늘날, 디지털 포렌식은 살인, 실종, 교통사고, 사이버 범죄 등
수많은 사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하나입니다.
기술은 진실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인간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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