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술통 속, 한 소녀의 비극
1978년 4월 8일, 전북 군산의 한 양조장에서 믿기 힘든 사건이 발생했다.
백화양조의 한 직원이 아침 작업 도중 술 발효통을 점검하던 중, 심하게 부패된 여성의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경찰이 즉시 공장을 봉쇄하고 수사에 착수한 결과, 시신은 며칠 전 실종신고가 접수된 군산여상 3학년 B양(18세)으로 밝혀졌다.
현장 주변에서는 피해자의 소지품과 교복 일부, 신발까지도 발견되면서 단순 실종이 아닌, 끔찍한 범죄임이 드러났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 감정, 오해, 그리고 비극
조사 결과, 가해자로 지목된 인물은 A군(18세). 그는 백화양조 계열사 사장의 아들이자, 피해자 B양과는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두 사람은 고등학생 시절 짧은 교제 관계였지만, A군은 점차 B양의 사적인 관계에 집착과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사건 당일, A군은 새벽에 B양을 공장으로 불러냈다. 다툼 끝에 B양은 “결백을 증명하겠다”며 옷을 벗고 자신의 몸을 보여주는 극단적 행동을 보였고, A군은 모욕감을 느끼고 분노했다.
이후 B양은 충격으로 실신했고, A군은 그녀가 사망한 줄 알고 술 발효통에 시신을 유기했다. 그러나 부검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B양은 죽지 않았으며, 결국 술통 안에서 익사한 것으로 확인됐다.
진실을 끌어낸 열쇠 – 거짓말탐지기
수사 초기, 경찰은 A군을 비롯한 관련자 20여 명에 대해 탐문, 통화내역 조사, 자필진술 등을 확보하며 사건을 좁혀갔다.
하지만 결정적인 돌파구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수사기법, **폴리그래프(거짓말탐지기)**였다.
서울지방경찰청의 폴리그래프 검사에서 A군은
- 심박수 급등
- 발한반응 증가
- 호흡 패턴 변화
등의 반응을 보여 ‘거짓’ 반응으로 분석됐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한 심리적 압박 수사 끝에 A군은 결국 “죽은 줄 알고 술통에 넣었다”고 진술했다.
재판이 남긴 기록 – 과실치사와 과학수사의 도입
법원은 이 사건에서 폴리그래프 결과를 보강증거로 인정하는 이례적인 결정을 내렸다.
1심 판결 요지
“고의 살인은 아니지만, 중대한 과실에 따른 유기와 사망은 명백하다.”
- 형량: 징역 장기 3년, 단기 2년 6개월
대법원 판단
“폴리그래프는 독립 증거로는 제한적이나, 진술의 신빙성을 보완하는 보조수단으로 의미가 있다.”
이 판결은 이후 유사 사건에서 심리포렌식과 과학수사의 기반이 되는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
사회적 여파 – 무너진 기업, 퍼진 괴담
이 사건은 단순한 살인사건을 넘어 사회 전반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언론은 “소주통에서 시체 발견”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대대적인 보도를 했고,
‘시체 들어간 술’이라는 괴담이 전국에 퍼지며 대중의 공포를 자극했다.
백화양조는 해명 기자회견, 관련 잡지 전량 수거·소각 등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회복하지 못했다.
결국 1985년 두산에 인수되었고, 2009년에는 롯데주류에 넘어가며 현재는 **‘백화수복’**이라는 브랜드만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포렌식 관점에서 본 이 사건의 의의
이 비극적인 사건은 한국 과학수사의 발전에 중요한 세 가지 전환점을 남겼다.
① 거짓말탐지기의 법적 활용
- 국내 최초로 도입, 이후 심리포렌식의 시초가 됨
② 심리유도 기반 자백 유도 기술
- 물적 증거 부족 상황에서도 과학적 접근 가능성을 제시
③ 기술 기반 수사 철학의 시작
- 오늘날 디지털 포렌식(CCTV, 통신내역, 위치정보 등)의 이론적 기초
맺으며 – 기억은 왜곡될 수 있어도, 반응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1978년의 백화양조 사건은 디지털 포렌식과 과학수사의 태동을 알린 대한민국 과학수사의 출발점이었다.
사람의 기억은 흔들릴 수 있지만, 과학적 반응은 그 거짓을 파고들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AI 분석, 통신 내역 추적, 영상 복원 등 수많은 도구로 사건을 재구성하고 있지만,
그 출발은 술통 속에 묻힌 진실을 과학으로 끌어올리려던 작은 시도에서 비롯됐다.
“기억은 왜곡될 수 있어도, 반응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 과학수사요원 K의 회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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